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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란 무엇인가
평화란 무엇인가? ‘전쟁 없는 상태’ 그 이상을 말하다
“왜 사람은 싸울까?”
개인도, 나라도 때로는 싸웁니다. 그러나 싸움을 위한 싸움은 없습니다. 싸우는 이유는 결국 승리와 그 이후의 평화로운 삶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싸움은 평화를 위한 수단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렇게 얻은 평화란 과연 진짜 평화일까?”
힘으로 만든 평화의 이면
영어 단어 peace는 라틴어 pax에서 유래했습니다. pax는 법적 계약이나 협정, 즉 힘에 의한 평화를 의미합니다.
- 팍스 로마나(Pax Romana) : 로마의 힘으로 강요된 평화
- 팍스 브리태니커(Pax Britannica) : 대영 제국의 식민 지배 아래 유지된 평화
-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 미국의 영향력 아래 형성된 국제 질서
이처럼 pax는 지배와 통제, 폭력을 기반으로 한 평화입니다. 외면상 평화로 보여도, 그 안에는 억압, 착취, 파괴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한자 ‘평화(平和)’가 말하는 진짜 의미
반면, 우리말의 ‘평화’는 한자어로 ‘평(平)’ + ‘화(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平 (평) : 수면 위에 뜬 풀잎처럼 균형과 안정을 의미
- 和 (화) : 입(口)과 벼(禾)의 결합, 곡식을 나누어 먹는 화목한 상태
즉, ‘평화’라는 말 속에는 이미 강요나 폭력의 개념이 없습니다.
그 자체로 고요하고, 균형 잡히고, 나누며 사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와 연결된 우리말도 많습니다:
- 화평(和平) : 관계에 초점을 둔 평화
- 평온(平溫) : 외부 환경의 조용한 상태
- 평안(平安) : 내면의 안정된 마음
- 평강(平康) : 건강하고 안정된 삶
평화의 두 얼굴: 소극적 vs 적극적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서처럼, 대부분이 생각하는 평화는 전쟁이나 갈등이 없는 상태일 것입니다. 이것을 ‘소극적 평화’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오늘날 평화학에서는 다음 단계를 말합니다.
불평등, 차별, 억압이 없는 상태, 이것이 바로 ‘적극적 평화’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단순히 총성이 멎은 상태가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함께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평화는 ‘마음’에서도 시작된다
‘평화’는 외부의 객관적인 상태인 동시에,
내면의 주관적인 감정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조용해도 내 마음이 불안하다면, 우리는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 찬송가에서는 종종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 영혼 평안해”, “마음속에 있는 이 평안함”
진짜 평화는 ‘평안한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평화는 곧 ‘화평한 관계’이다
중국에서는 ‘평화’를 화평(和平)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여기에는 관계의 회복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화평하게 하는 자가 복이 있다”(마 5:9)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피스메이커(peacemaker)는 단순한 중재자가 아니라,
갈등을 치유하고 연결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사회의 갈등이 점점 깊어지는 지금,
가정에서, 직장에서, 정치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의 역할이 절실합니다.
현대 평화학이 말하는 ‘평화의 5대 영역’
현대 평화학은 다음 5가지 영역에서 평화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 개인의 마음 → 평안
-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 화평
- 한 사회 내의 질서 → 평온
- 국가 간의 관계 → 외교적 평화
- 자연과의 관계 → 생태적 조화
놀랍게도 이 모든 영역은 히브리어 ‘샬롬(Shalom)’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됩니다.
샬롬은 단지 ‘평화’만이 아닌, 형통, 안녕, 안전, 조화를 모두 포함한 개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평강의 왕’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평화란 무엇인가?
- 평화는 싸움을 멈춘 상태가 아니라, 불공정이 없는 상태입니다.
- 평화는 외부의 고요함(평온)이자, 내면의 안정(평안)입니다.
- 평화는 지배가 아닌, 나눔과 공존의 관계(화평)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평화를 원한다면,
힘으로 이루는 pax가 아닌, ‘평(平)’과 ‘화(和)’의 지혜를 따라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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