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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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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적 퇴행과 건강한 가정— 어른도 때때로 아이가 되고 싶다


■ 퇴행, 누구나 겪는 자연스러운 심리 반응

사람들은 아플 때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곤 합니다. 이를테면 몸살감기에 걸린 남편이 평소의 어른스러운 태도는 온데간데없고, 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모습을 본 적 있으신가요? 꼭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안기며 위로받고 싶어 하듯, 어른들도 힘들 때 무의식적으로 어린 시절의 편안했던 시기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심리가 작용합니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퇴행(regression)’이라고 부릅니다.

퇴행은 발달 단계에서 이전 시기로 일시적으로 되돌아가는 심리적 현상입니다. 예를 들어, 평소에는 성숙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을 때 갑자기 어린아이처럼 감정적으로 행동하거나, 의존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퇴행은 반드시 부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건강한 퇴행은 우리가 감정적으로 치유받고, 삶의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 건강한 퇴행 vs 병적인 퇴행

퇴행에는 두 가지 양상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건강한 퇴행, 또 하나는 병적인 퇴행입니다.

  • 건강한 퇴행은 일시적으로 감정을 내려놓고 위로받으며 회복하는 과정입니다. 가족이나 신뢰하는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허용될 때, 이는 오히려 관계를 더욱 친밀하게 만들어 주고, 정서적인 휴식을 제공해 줍니다.
  • 반면에 병적인 퇴행은 일상생활이나 사회적 기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정도로 감정적, 행동적으로 퇴보하는 상태입니다. 타인에게 과도하게 의존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려는 방식으로 나타날 경우 관계를 악화시키고 갈등을 유발하게 됩니다.

즉, 퇴행은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건강한 회복의 통로가 될 수도, 관계를 해치는 요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 가면과 페르소나: 왜 집에서 퇴행이 나타나는가?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은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맡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쓰는 ‘가면’을 페르소나(Persona)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직장에서, 학교에서,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각기 다른 역할에 맞춰 가면을 씁니다.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성숙한 어른처럼 행동하고, 감정을 숨기며,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하죠.

하지만 이 가면과 실제 자아 사이의 차이가 클수록 우리는 더 많은 스트레스와 피로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가면을 벗고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심리적 퇴행이 가장 자주, 자연스럽게 발생합니다.


■ 어른도 어리광 부릴 수 있다

어른도 지칠 수 있고, 때때로 아이처럼 위로받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일시적이며 서로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관계를 더욱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아내에게 아이처럼 투정하거나, 아내가 남편에게 철없는 동생처럼 행동하는 모습이 이에 해당됩니다. 이때 상대방이 부모처럼, 혹은 듬직한 형제처럼 따뜻하게 받아줄 수 있다면, 상호 간의 심리적 안정감은 더욱 커지고, 감정적으로도 충전되는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 퇴행은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신호’

퇴행은 단순한 이상 행동이 아니라, “나는 지금 에너지가 부족해. 위로받고 싶어.”라는 신호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어린 딸처럼 투정부릴 때, 남편이 따뜻한 아버지처럼 품어주면 아내는 감정적으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철없는 아들처럼 굴 때, 아내가 너그러이 품어주면 남편 역시 감정을 정리하고 다시금 어른으로 돌아갈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우리가 어른으로 살아가야 할 책임과 의무는 무겁습니다. 회사에서, 사회에서 끊임없이 요구되는 성숙함과 자기 절제는 어느 순간 우리를 소진시키기도 하죠. 그래서 집은, 퇴행을 통해 다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야 합니다.


■ 왜 사람들은 유년기로 돌아가고 싶어할까?

심리학자 이무석 박사는 『성격, 아는 만큼 자유로워진다』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이 힘들 때 사람은 책임감을 벗어버릴 수 있는 유년기로 퇴행하게 된다.”

유년기에는 실수를 해도 용납되고, 사랑을 받는 시기였습니다. 죄책감도 덜하고, 자유롭게 감정을 표현해도 괜찮았죠. 그래서 힘든 순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 시절의 ‘이해받고 사랑받던 기억’을 떠올리고, 그 시절로 돌아가려는 심리가 발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 건강한 퇴행을 위해 필요한 것

퇴행은 억제하거나 숨겨야 할 감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건강한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야 할 부분입니다. 단,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1. 일시적일 것 – 퇴행은 잠시 쉬는 시간이 되어야지, 그 상태에 머물러선 안 됩니다.
  2. 상호 용납될 것 – 가족 구성원이 서로의 퇴행을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정서적으로 안전한 환경 – 퇴행은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므로, 비난이나 조롱 없이 받아주는 환경이 중요합니다.
  4. 퇴행 후 회복과 전진 – 퇴행은 쉼을 위한 도구이지, 회피를 위한 방어기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결국, 퇴행을 통해 감정의 긴장을 풀고, 다시 성숙한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돕는 구조가 가장 중요합니다.


■ “집에서는 어른이 아닌 나로 있어도 괜찮아”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사람들이라도 집에서는 넥타이를 풀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으며, 감정을 표현하고 싶어집니다. 가정은 우리가 가면을 벗고도 사랑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어야 합니다.

그러니 가족끼리는 서로의 퇴행을 단순히 철없음이나 유치함으로 치부하지 말고, “지금 이 사람이 에너지가 고갈됐구나”라고 이해해보는 건 어떨까요?

그 따뜻한 이해는 상대방에게 다시 세상을 살아갈 힘을 줄 수 있고, 관계를 더욱 깊이 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 마무리: 퇴행,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쉼표’

우리는 하루하루 어른으로 살아가느라 참 많은 것을 참고 살아갑니다. 그러다보면 감정은 고이고, 몸과 마음은 지치기 마련입니다. 이럴 때 퇴행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쉼표가 될 수 있습니다.

퇴행을 통해 일시적으로 유년기로 돌아가더라도, 다시 성숙한 어른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그것은 건강한 순환입니다. 퇴행을 이해하고 품어주는 가족이 있다면, 우리는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심리적 기반을 갖게 되는 셈입니다.

그러니 가정에서만큼은 서로의 퇴행을 품어주는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세요. 그렇게 우리는 다시 충전되고,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며, 건강한 가정이라는 이름의 따뜻한 쉼터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