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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와 제도
효도와 제도

효도와 제도 사이에서 – 신뢰와 공동체의 본질을 묻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법과 제도로 운영되지만, 인간관계의 가장 깊은 곳에는 신뢰와 사랑이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1970년대 북한의 ‘오호담당제’ 이야기를 시작으로, 천륜(天倫)과 법, 그리고 공동체의 신뢰라는 주제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북한의 ‘오호담당제’ 이야기

1970년대, 동서 냉전이 극심하던 시절 학교에서는 북한 체제를 배우며 공산주의와 싸워야 한다는 교육을 받곤 했습니다.
그중 아직도 기억나는 제도가 바로 ‘오호담당제’입니다.

  • 5가구마다 1명의 감시원을 배치해 주민들을 철저히 감시
  • 가족 중 누군가 잘못을 하면 감시원이 알아채기 전에 당(黨)에 먼저 신고하도록 장려

특히 부모가 잘못했을 때 자식이 신고하는 것까지 권장한다는 말에 어린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2. 부모와 자식 사이의 ‘천륜’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흔히 천륜(天倫)이라 부릅니다.
갓난아기 때부터 부모는 아이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습니다.
그 사랑은 조건 없는 본능적인 사랑이며, 사람뿐 아니라 동물에게서도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잘못했다고 자식이 신고한다면, 과연 그것이 옳은 것일까요?
가정은 공동체의 가장 작은 단위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신뢰가 무너지는 순간 가정은 지옥과 같은 공간이 될 수 있습니다. 사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3. 신뢰가 무너진 사회의 문제

공동체를 구성하는 핵심은 신뢰입니다.
신뢰가 무너지면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감시합니다. 그러면

  • 도덕은 붕괴되고
  • 법과 제도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며
  • 공동체는 불신의 악순환에 빠집니다.

북한 독재 체제는 바로 이런 불신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주민들이 서로 감시하도록 합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더욱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4. 공자의 ‘정직’에 대한 가르침

공자는 이러한 문제를 일찍이 간파했습니다. 『논어』에는 섭공과 공자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섭공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고향 사람들은 정직합니다. 아버지가 양을 훔치면 자식이 신고합니다.”

이에 공자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우리 고향의 정직은 다릅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숨겨주고, 자식은 아버지를 위해 숨겨줍니다. 정직은 그 가운데 있습니다.

공자가 말한 정직은 법의 잣대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부여한 이치(천리, 天理)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즉, 천륜을 따르는 것이 진정한 정직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5. 법과 천륜 사이의 고민 – 순임금의 사례

고대 중국에서도 이 논쟁은 이어졌습니다.

“만약 순임금의 아버지가 살인을 저질렀다면 순임금은 어떻게 했을까?”

공자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는 왕위를 버리고 아버지를 업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멀리 떠날 것이다.”

공자는 법을 어기는 순간 공동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천륜을 거부하는 순간 역시 공동체의 신뢰가 무너진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그는 법과 천륜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대신,
제3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지혜를 보여주었습니다.


6. 신뢰를 세우는 사회가 좋은 정치의 시작

법과 제도를 무조건 앞세우는 정치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서로를 감시하고 불신하는 사회가 아니라,
따뜻한 마음으로 존중과 배려가 살아 있는 사회가 좋은 정치의 지향점입니다.

우리 삶은 이항대립 속에서 하나만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고 답하며 더 나은 길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법과 제도는 필요하지만, 그 위에 천륜과 신뢰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